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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안녕"…이 시대에 사라져 버려야할 단어 '썸'

Style M 2015.03.20 01:45

[김정훈의 썸-40·끝] 실패는 성장의 계기…연애에서 만큼은 무모한 도전을 해도 좋다


썸. 묘한 단어가 등장했다. 짜릿한 흥분과 극도의 불안감이 공존하는 롤러코스터 마냥, 탈까 말까 망설여지기도 하고. 간질 간질. 정체를 알 수 없는 간지러움에 마냥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사랑만큼 떨리지만 이별보다 허무한 '썸'. 그리고 편식남 편식녀를 비롯한 그 밖의 다양한 '썸'에 대한 연애칼럼니스트 김정훈의 토킹 릴레이.


/사진=M@rg in Flickr


사실 난 '썸'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썸'이란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필자가 그 단어를 싫어한다는 게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이다. '썸'이란 단어의 본래 의미는 이미 오래전에 상실 돼 버렸다. "썸이 뭐야? 먹는 거야?"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종종 말한다. 먹으면 해로우니 절대 먹으면 안된다고.


본격적인 연애가 시작되기 전 불가항력적으로 겪게 되는 시간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지 조차 모르던 낯선 상대를 인식하고 그가 의미를 가지기 시작할 때의 두근거림, 상대방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은지 궁금해 잠 못 이루는 떨림, 그보다 더 큰 행복을 위해서 한 발짝 더 다가서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설레는 기간이다. 그 묘한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대에게 더 깊은 관심과 감정을 쏟아 붓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 기간의 존재 이유였다.


그걸 '썸'이라는 단어로 규정짓게 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해 버렸다. 썸 열풍은 순식간에 번져나갔고, 그 명칭에 인위적인 형태와 의미를 부여함에 따라 잘못된 활용사례가 속속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존재해야 했던 시간은 당연히 존재해도 되는 것이 돼 버리고 말았고 서둘러 그 기간에서 벗어나려 애쓰던 사람들은 그걸 즐기는 걸 당연스레 여기게 됐다. 정체를 알 수 없어 두근거릴 수 있었던 자연스런 감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작위적인 설렘이 자리잡고 말았다. "이게 뭐지?"라고 고민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해답을 던져 주긴 했다. 하지만 풀이 과정에 대한 이해가 생략된 채 정답만 훔쳐본다고 해서 문제를 푸는 실력이 향상되진 않는 법이다. 서둘러 만들어낸 정의로 포장된 관계는 언제 무너져도 좋은 모래성과 같았다. 그렇게 '썸'이란 단어는 그저 '엔조이'를 합리화하는 역기능을 낳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과 당연히 그래도 되는 것엔 엄연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가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역기능 중 하나는 본인이 가져야 했던 불안의 감정을 상대에 대한 불만으로 바꿔 놓는 것이다. 사람은 탯줄에서 분리되면서부터 불안의 감정을 알게 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쓴다. '썸'이란 관계가 억지로 정의되기 전엔, 그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본인의 감정을 더 파고들었던 것 같다. 내가 이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는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나는 그를 왜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생각은 행동을 하게 만든다. 어떤 계산법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 정답에 대한 확신도 없었지만 몸과 마음을 능동적으로 움직이는데 있어 망설임이 덜했다.


/사진=Mr. Theklan in Flickr


지금은 그 불안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본인이 아닌 상대에 집중한다. 참 편해졌다. '그래도 될까?'라며 조심스러웠던 것들은 너무나 쉽게 '당연히 그래도 되는 것'이 돼 버렸으니까. 확실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해답을 구할 자신이 없으므로 상대에게 그 책임을 묻는다. 내가 불안한 이유는 상대의 모자람 때문이며, 결국 더 나은 상대를 만나면 이 불안함을 갖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한다. 부족한 것은 나의 감정이 아닌 상대의 스펙이며 그렇게 불안 아닌 불만의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상대와는 어울리지 않을 거라 단정짓게 되는 것이다. 결국 더 큰 옥수수를 찾아 헤매던 우리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벌판 위에서 허무함으로 무장한 스스로를 마주하게 된다. 도와주는 이 없는 그곳에서 우리는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다. 혼자서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은 진즉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확장하자면, '썸'이라는 단어는 이 시대가 만들어낸 유쾌하지 않은 단어이기도 하다. 이도저도 아닌 상태의 우리들, 외부에서 요구하는 각종 이미지를 소화하기에 급급하느라 가슴 속에 갖고 있는 두루뭉술한 무언가를 구체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을 대표하는 단어다. 우린 태어날 때부터 입어야 하는 수많은 역할의 옷들을 스타일링 하기에 바빠서 발가벗은 내 모습이 어떤지에 대해 제대로 바라볼 시간조차 없었다. 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하는지도 모르는 취준생들은 그저 회사 입맛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이력서의 한 줄과 취미와 특기를 채우느라 애쓴다. 사랑하는 방법대신 사랑받는 방법에만 몰두하는 썸남썸녀들의 자세와 다를 바 없다.


썸이란 관계는 나약하다. 명확한 관계를 규정짓지 못하고 적당한 이득만 주고받는다. 무거운 책임감과 같이 힘들고 싫은 것들은 굳이 가지려 하지 않는 거다. 철저하게 계산된 합리적 선택만을 선호하고 낭만과 도전은 입으로만 외치는 현실과 참 어울리는 관계다. 오늘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수많은 책들과 유튜브 강연, 이상적인 연애와 사랑관은 그저 즐겨찾기에만 등록시켜 놨을 뿐이다. 불안한 상태를 두려워하는 우리는 현실에의 불만을 외치면서도 그 상태를 벗어나려 하진 않는다. 썸을 즐기는 사람들이 그렇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합리화시키며 상대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어장관리에 몰두한다. 그들에게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불만보단 불안한 상태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사진=pedrosimoes7 in Flickr


처음 칼럼 연재를 제안 받고 제목을 정해야 했을 때, 거의 반사적으로 '썸'이란 단어를 생각해 냈던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썸 이란 단어를 규정지음으로 인해 생겨 버린 많은 문제들, 그것으로 인해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재조명한 뒤 모조리 걷어내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칼럼의 마지막 회 차 내용은 늘 정해놓고 있었다. 썸 이란 단어를 없애자는 것이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40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친다.

그와 동시에 모두에게서 '썸'이라는 단어, 그 관계를 지워버리고 싶다. 정말로 '썸'이란 단어를 지워 버리는 건 SF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적어도 모두가 불안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확신 없는 상태에 놓여있는 스스로에 대해, 그런 상대와의 관계가 주는 불안감에 지나치게 굴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연애에서 만큼은 무모한 도전을 해도 좋다. 실패하는 연애는 그 나름대로 성장의 계기가 된다.


지난 칼럼을 연재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중 하나는 "왜 필자는 보여주지 않아도 될 부분까지 굳이 그렇게 파고들어 드러내려 하느냐?"라는 것 이었다. 그게 목적이긴 했다. 필자의 연애칼럼은 어떤 지침을 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다소 무모한 도전에서 닥칠지도 모를, 본인이 경험하지 못했던 수많은 장애물들에 대해 미리 소개하는 역할정도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썸'을 주제로 한 칼럼은 끝나지만, 조만간 새로운 이야기를 좀 더 발칙하게 풀어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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